경북 영덕군의 한 마을 주택이 산불로 전소된 광경. 시간이 지나면서 집 주변 잿더미 사이에서 초록색 풀이 돋아났다. 김원효



2025년 3월 22일, 경북 의성군에서 시작된 산불은 거센 바람을 타고 무섭게 확산됐다. 불길은 산을 타고 들을 건너 동해를 향해 거침없이 번져갔다. 마치 숨을 들이마신 괴물처럼 그 기세는 멈추지 않았다. 수십 년간 쌓아온 인간의 기억이 한순간에 재로 사라졌다. 가장 큰 피해를 본 영덕군 지품면에는 정부 복구팀이 긴급 투입됐고, 나의 회사 역시 그 팀의 일원으로 그 땅에 발을 디뎠다(나는 건설과 철거를 하는 회사를 운영하면서 화장품 회사 임원으로 일하는 '투잡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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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처음 도착했을 때, 그곳은 말 그대로 '그을린 땅'이었다. 발등을 간질이는 재와 먼지, 붉은 하늘을 뒤덮은 그을음, 불타 사라진 것들이 남긴 정적이었다. 지구의 피부는 큰 화상을 입은 피부처럼 문드러져 있었고, 삶을 품고 있던 살결이 그대로 찢겨나간 듯했다. 

거대한 상처 앞에 선 시간우리는 먼저 무너진 마부자만들기
을회관 잔해를 걷어내며 일을 시작했다. 잔해 아래엔 누군가의 하루와 계절, 그리고 평범했던 일상이 그대로 묻혀 있다. 나는 순간 깨달았다. 폐허 위에 첫 삽을 뜨는 일은 단지 노동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지품면의 땅은 검게 타 있었다. 가지 끝마다 재가 앉았다. 마치 봄날 서울 여의도 윤중로의 벚꽃 휘날리듯주식주문가능시간
바람이 불 때마다 재와 함께 기억이 흩날렸다. 그 광경은 마치 거대한 시집의 페이지들이 한 장씩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영덕군의 산과 마을 중 4분의 1 이상이 사라졌다. 수천 채의 집이 흔적도 없이 불타 버렸고, 어떤 이들은 자신이 살았던 곳이 어디였는지도 기억 못 할 정도였다. 사라진 것은 집뿐이 아니다. 사람들에게는 그간의 삶의 온라인바다이야기게임
기억과 시간, 장소, 관계의 좌표가 함께 탔으리라. 숫자와 통계로는 결코 다 담을 수 없는 삶의 파편이 그곳엔 가득했다.
노물리 마을에서는 열두 척의 어선이 바다를 등진 채 선착장에 정박해 있었지만, 불길에 휘말려 검은 뼈만 남았다. 그 장면은 마치 바다마저 등을 돌린 듯한 절망의 풍경이었다. 땅뿐 아니라, 물도 불에 패배한 셈이었다. 인키움증권
근의 나무로 지어진 작은 집 안에는 반쯤 탄 고무장화가 조용히 놓여 있다. 그 앞에 멍하니 앉아 있던 어르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한쪽 기둥이 폭삭 내려앉은 벽에서 깨지고 그을린 가족사진 액자를 찾아내더니 조심스레 꺼내 품속에 넣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우리 애들 어릴 때 사진인데…." 그 말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어르신은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예전 애들이 도시로 나가기 전에는 모두 함께 여기 앉아 TV를 봤어요. 여름엔 고기를 잡고, 겨울엔 그물을 꿰고…다 그랬지."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눈동자는 멀리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와 나란히 앉아 까맣게 그을린 선착장을 함께 바라보았다.
그날의 바람은 목격자였다. 바람은 불을 이끌었고, 불은 삶을 뒤덮었다. 나는 현장에서 인부들을 관리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식당도 마땅찮아 식사는 도시락과 간식으로 때웠다. 필요한 물자는 읍내까지 나가서 사와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불편함은 우리에게 주어진 작은 시련일 뿐이었다. 매일 아침, 하루치의 물품과 생각을 챙겨 지품면으로 향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종종 하늘을 올려다보며 언제쯤 이 모든 것이 끝날지 궁금했다. 누구도 힘들다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곳에서의 불편은 사치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땀은, 이재민들의 눈물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작업은 단순하고 반복적이었다. 쓰러진 지붕을 걷고, 무너진 기둥을 해체하고, 폐자재를 분류했다. 시간은 멈춘 듯했고, 우리는 기계처럼 움직였다. 망치질과 철거음만이 공기 속을 채웠다.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고, 팔은 바위처럼 무거웠다. 
"오늘 안에는 저 언덕까진 가야 해." 
누군가 중얼거리듯 말하면, 나머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보다 중요한 것은 손끝의 감각이었다.

상처 딛고 다시 자라나는 삶그러던 어느 날 작업이 익숙해지던 즈음, 나는 잠깐의 휴식 시간에 바위에 걸터앉았다. 등 뒤로는 여전히 그을음이 남아 있었고, 앞엔 탄 산자락이 누워 있었다. 그 풍경은 마치 거대한 수묵화 같았다. 검은 선과 여백 사이로, 타버린 시간이 조용히 드러나는 듯했다. 나는 지친 얼굴에 재생 크림을 바르며 햇빛을 피하고 있었다. 그 순간, 문득 내 손끝의 감각과 눈앞 풍경이 포개지는 듯했다. 검은 땅 위에 작은 풀잎이 올라오고 있었다. 말라버린 가지 끝에 아주 연한 녹색 싹이 피어나고 있었다. 검은 땅 위에 솟아난 풀잎은, 나의 피부에 다시 돋아나는 살결과도 같았다. 그것은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기적이었다.

며칠 후, 그 풀잎은 셋이 됐고, 주변엔 이름 모를 작은 꽃도 피었다. 벌레가 기어다니고, 이름 모를 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울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날개 소리였다. 자연은 인간의 시선 밖에서도 조용히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땅은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었다. 지구의 피부가, 비로소 다시 숨 쉬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그 장면 앞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회복의 시작은 언제나 미세한 변화로 다가온다.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생명의 본능이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아무도 기대하지 않아도 자연은 자기 방식대로 다시 태어난다.
그 순간, 불현듯 내 얼굴을 떠올렸다. 건설업에 종사하다 보니 나는 늘 현장의 긴장감 속에서 살아왔다.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나고, 한순간의 방심이 재해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피부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햇볕, 먼지, 시멘트, 철분, 그리고 땀. 이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야말로 직업의 숙명이었다. 안전이 외모보다 우선이었고, 생존이 아름다움보다 중요했다. 자칫 땀과 화장품이 눈이나 입으로 함께 흐르면 사고 위험이 있기에 나는 얼굴엔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것도 바르지 않는 것이 안전했다. 그렇게 수년이 흘렀고, 거울 속 나의 얼굴은 점점 거칠고 어두워졌다. 불탄 산처럼, 나의 얼굴도 오래도록 숨죽여 있었다.
피부가 상하자 인상도 변했고, 인상이 변하자 사람을 대하는 나의 태도도 바뀌었다. 자신감은 눈빛에서 지워졌고, 나는 천천히, 아주 조용히 내면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었다. 거울을 피하던 내 습관은 엘리베이터나 상점 유리 앞에서도 이어졌다. 그렇게 나는 나 자신과도 멀어져 가고 있었다. 

무력감 속에 자라는 작은 싹그러던 어느 날, 당뇨병 환자를 대상으로 피부 괴사를 복원하는 연구에 대해 들었고, 연구진 중 한 명과 피부 재생 원리에 대해 얘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처음엔 반신반의했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내 피부도 다시 예전 피부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말에 가슴이 벅찼다. 

그의 제안대로 두어 달 피부에 신경 쓰며 관리했다. 그런데 얼굴은 놀랍도록 변하기 시작했다. 피부가 부드러워지고, 안색이 밝아졌으며, 무엇보다 표정이 달라졌다. 다시 웃을 수 있게 됐다. 표정 하나에도 빛이 깃들고, 말투에도 숨결이 돌기 시작했다. 피부가 재생되자 내 안에서 무언가가 다시 일어났다. 마치 검은 숲에 연초록 싹이 돋듯, 나의 시선에도 생기가 돌았다. 재 속에서 새싹이 돋아나듯 나의 삶도 점차 복원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사용자였지만, 효과를 체험한 나는 점차 회복의 경험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어졌다. 그래서 직접 화장품 회사의 유통부문에도 참여하게 됐고, 크고 작은 설명회나 상담회에도 나가게 됐다. 나처럼 피부로부터 삶이 회복된 사람들을 만나며,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누군가는 오랜 아토피로 고통받았고, 누군가는 화상 후 트라우마를 안고 있었다. 그들은 말했다. 
"남들이 보는 나의 가장 외면, 즉 피부가 바뀌면 자신감이 생겨요. 내가 가장 자신 있던 시절로 다시 돌아간 기분이죠."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마치 또 하나의 풀잎이 피어난 듯한 감동을 느꼈다. 그렇게 나는, 이 회복의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어졌다. 그것은 화장품이 아니라 신뢰의 이야기였다. 회복에 대한 믿음, 자기 돌봄에 대한 권리, 생명에 대한 경의. 나는 그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삶에서 큰 상처를 마주할 때, 우리는 종종 무력감에 빠진다. 하지만 그 무력감 속에서도 작은 싹은 자라기 시작한다. 그 변화는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미약할지라도,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회복의 시작임을 나는 알게 됐다. 회복은 갑작스러운 기적 같은 상황이 아니라, 꾸준한 마음의 돌봄과 시간의 축적임을 깨달았다. 그러니 희망은 언제나 가까이 있고, 그 풀잎처럼 소중히 지켜져야 한다.
지품면의 산을 바라보며 나는 자주 생각한다. 피부는 단순한 신체의 겉면이 아니다. 우리 삶의 고단했던 시간이 그 위에 켜켜이 쌓인 기록이다. 그 흔적은 단지 상처가 아니라, 개인이 견뎌낸 고통과 이겨낸 마음의 역사다. 마치 깊은 바다 밑 퇴적층처럼, 서로 다른 시간과 경험이 포개져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내가 피부를 관리하는 이유지구의 피부 또한 마찬가지다. 불에 탄 산과 시커멓게 변한 들판은 단지 파괴의 흔적이 아니다. 자연이 끊임없이 순환하며 재생하는 긴 시간의 일부다. 지금은 죽은 듯 보이지만, 그 속에 이미 새 생명이 움트고 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자연순환의 한순간일 뿐이다. 그 안에서 상처를 입어도 포기하지 않는 힘을 배운다.

복구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눈빛은 고요했지만, 미래에 대한 단단한 약속처럼 다가왔다. 실수투성이였던 과거를 조용히 받아들이고 그 위에 다시 희망의 터전을 쌓는 삶의 무게였다. 무너진 집과 잃어버린 기억 앞에서도 그들은 소실된 시간을 아파하기보다는 앞으로 맞이할 시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손길에는 재건뿐 아니라 과거를 품으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강인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오랜 시련을 넘어, 그들은 새로운 일상과 기억을 만들어가는 주체였다.
커다란 사건의 여파는 단번에 치유되지 않는다. 그러나 작은 움직임이 쌓이고 모여 마음의 상처를 달래고, 공동체의 회복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이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텃밭에 씨앗을 뿌리고, 아이들 웃음소리가 다시 마을을 채우며, 서로를 지탱하는 조용한 손길이 더없이 강력한 재생의 증거가 됐다. 삶은, 다시 조용히 그리고 확실하게 걸음을 떼고 있었다.
나는 오늘도 피부 재생 크림을 바른다. 한 겹의 시간이 지나간 자리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 마음으로. 그러면서 내 손끝은 기억한다. 불에 탄 산 위에서 내가 본 그 작은 풀잎을.
그 풀잎은 희망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 빛이 있다는 걸, 나는 그 잿더미 속에서 처음 배웠다. 그 희망은 나였고, 나는 다시 사랑받을 수 있는 피부 위에 살아 있었다. 
김원효 ㈜대정 대표·㈜닥터락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