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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피광태 댓글 0건 조회 1회 작성일 26-10-03 12:23연락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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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웅진 의원의 딸 김옥자 여사님 고양시 화정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찍었다.
ⓒ 민병래
제가 1941년생이니 올해 86세입니다. 4년 전 갑자기 몸무게가 줄더군요. 알고 보니 암이었습니다. 오른쪽 폐를 절반 가까이 잘라내고 잘 회복 중이었는데 얼마 전 재발했다는 판정을 받았어요. 90을 바라보는 나이고, 세 아들이 잘들 살아가고 있으니 담담하게 받아들이렵니다. 이제 생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 이야기, 우리 가족이 살아온 이야기 몇 토막 남기고 싶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제헌 국회의원인 김웅진입니다, 수원에서 무소속으로 당선했죠. 당신은 1948년 8월 5일, 제헌국회 제40차 본회의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을 위해 기초위원회를 제안했어요. 아버지의 뜻은 대부분이 동의해, 반민특위법은 9월 7일에 본회의를 통과했고 반민특위는 곧바로 활동하게 됩니다.
화신백화. 사장으로 일본에 비행기까지 헌납한 박흥식을 반민특위가 제1호로 체포했을 때, 장안에는 만세 소리가 드높았다고 해요. 드디어 민족정기를 세우게 되었다고. 하지만 순탄치 않았죠. 노덕술이 체포되자 이승만은 기어이 반민특위를 공격하라고 지시했죠. 1949년 6월 6일은 해방 뒤 가장 슬픈 날이었습니다. 반민특위가 노덕술에 이어 악질 친일경찰이었던 최운하 서울시경 사찰과장까지 체포하자 경찰은 조직적으로 저항에 나서죠. 이날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은 사복경찰 40여 명을 데리고 반민특위사무실을 포위·공격했습니다. 살벌한 폭력을 쓰며 특위 요원을 체포·연행했다고 해요. 반민특위 특별 검찰부에서 활동한 아버지의 고초가 말이 아니었겠죠.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에 의해 무너진 것과 더불어 이문원·최태규·이구수 같은 소장파 의원이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조작되어 구속된 일도 아버지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 반민특위를 만드는 데 힘을 모았던 이들이 줄줄이 감옥에 갇히니 아버지로서는 힘을 잃을 수밖에요. 그런 가운데서 치러진 1950년 5월 30일 제2대 총선에서, 아버지는 다시 당선되어 재선 국회의원이 됩니다. 이때 세 딸에 이어 아들로 태어난 막내의 돌도 다가오고 있어 크게 잔치해야 한다고 집안 분위기가 들떴죠.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납북되고 맙니다.
당신 없이도 4남매를 잘 키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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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여름에 헤어져 눈감던 1983년까지 아버지를 그리다 숨진 엄마는 아버지 김웅진 의원을 만나게 되면 꼭 하고픈 얘기가 있다고 했어요. "당신 없이도 4남매를 자랑스럽게 키워냈다"라는 말이었죠. 엄마가 곧잘 늘어놓은 넋두리도 있어요. (요즘 인권 감수성에는 불편하게 들리겠지만) "아버지가 절름발이가 되었어도 좋다, 돌아오기만 하면 좋겠다"였어요. 또 "아버지가 오래 세월 북녘땅에서 보내 가정을 이뤘을 테니 딱 한 번만 본다면 만족하고 북의 가족에게 보내드리겠다"라고 하셨죠.
결국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엄마는 세상을 등졌어요. 엄마와 아빠의 넋은 군사분계선을 넘어 만나셨겠죠. 아버지가 황해도 재령에서 토목기사를 하다 1945년 겨울 임진강을 넘어 서울 묵정동에 자리 잡았으니, 지나온 길목 어딘가였을테죠. 임진강 폭이 제일 좁다는 연천군 호로고루 근처였을까요? 아니면 연백평야를 마주 보는 교동도 앞바다일까요? 두 분은 오작교 없이도 강물과 바닷물을 넘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버지 없는 집은 정말 기둥 뿌리가 뽑힌 상태였습니다. 재선 국회의원의 '사모님'인 엄마는 몸뻬 바지를 입고 청계천으로 나갔죠. 집에 있던 옷가지부터 팔았어요, 나중엔 옷감과 털실 장사를 하셨죠. 엄마는 시장에서 돌아오면, 몸을 추스르지도 않고 우리를 먹인다고 밥솥부터 올렸어요. 아빠가 진밥을 좋아하셨다나요. 물을 조금 넘치게 부으셨어요. 아버지 밥부터 놋쇠 그릇에 담아 아랫목에 묻어놓으셨어요. 엄마는 어느 날 홀연히 아빠가 문을 열고 들어오시리라 믿었죠. 끝내 아랫목 밥 한 공기는 수십 년 동안 주인을 찾지 못했지만...
엄마는 아버지가 북으로 끌려간 뒤, 우리에게 엄격하고 배움에도 공을 들였어요. 인민군 치하에서 지금 계성학교 자리에 임시로 열린 초등학교에도 밀어 넣었어요. 천막 교실에서 배운 건 "장백산 줄기줄기"로 시작하는 인민군 군가밖에 없었지만, 그때 처음으로 강해져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어요.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우리 집에는 또 슬픈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아버지의 전처소생인 오빠가 17살 학도병으로 출전했는데 숨졌다는 전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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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도 신기해요. 엄마 나이 서른 후반, 우리 사남매를 데리고 모진 세월을 어찌 살아오셨을까요? 사실 엄마는 자주 흐느꼈어요. 밤에는 하도 진땀을 흘리셔서 베갯잇에 요까지 젖었으니까요. 아버지가 그립고 막막하셨겠죠.
철없게도 저는 그런 엄마 앞에서 "아빠 없어서 힘들다"라고 자주 투정을 부렸어요. 왜 학년 초마다 환경조사서를 썼잖아요. 가족 사항 중, 아빠의 칸이 제일 난감했어요. 연락은 안 되고 생사는 알 수 없고. 그냥 빈칸으로 두고 선생님 눈치를 봤죠. 그런 날은 집으로 돌아와 엄마한테 아빠 왜 안 오시냐고 울면서 발을 굴렀죠.
이런 기억도 있어요. 어느 날인가 엄마가 일찍 집으로 오셨어요. 눈물이 그렁그렁하고 초췌한 모습이었죠. 동생과 나는 엄마 앞으로 달려갔어요. 엄마는 우리를 끌어안고는 계속 흐느끼셨어요. 누군가가 아빠의 소식을 전하고 갔대요. 아빠가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혔고 큰 고생을 했다는 얘기였어요. 저는 눈물을 쏟으며 같이 죽자는 엄마에게, "엄마 돈 있어? 우리 먹고 싶은 거 다 사 먹고 죽자"라고 했어요. 매일 허기진 나날이었지만 위로하기는커녕 엄마 마음에 못을 박았다는 생각에 지금도 죄송한 마음이 떠나지 않네요. 아마 그날이 내가 본 엄마의 마지막 눈물이었던 것 같아요.
아빠의 등에서 나던 땀 냄새, 솔잎 향기
열 살 때 헤어졌으나 아빠와 함께한 기억이 많아요. 당신들이 결혼한 뒤, 백일 치성까지 드려 3년 만에 가진 첫 아이니 얼마나 예뻤을까요? 사랑을 듬뿍 받고 컸죠. 아빠가 국회의원에 당선했을 때 국회에서 옷감을 선물로 줬는데 엄마는 그놈으로 세일러복을 맞춰주셨어요. 반도호텔에서 개원 축하 잔치가 열려, 태어나 처음 호텔에 갔어요. (엄마는 가시기를 마다하셨죠) 앉아서 하품만 하다, 아빠를 졸라 화장실에 갔는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양변기가 있었어요. 나는 어떻게 쓸 줄 몰라 실수를 하고 말았죠. 자주색 바지가 오줌에 젖으니 더욱 짙어졌고 나는 울상이 되어 아빠를 찾았어요. 아빠는 난감한 표정이었으나 행사를 뒤로 하고, 뒷수습을 해주셨어요.
그런 아빠가 전쟁이 나고 얼마 안 있어 사라지셨어요. 엄마는 아무리 물어도 답을 안 하는데 사촌 언니가 "삼촌이 밀짚모자를 쓴 채 내무서원에게 양팔을 잡혀 끌려갔다"라고 알려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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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먹을 꼭 쥐며 울음을 참았어요. 다른 아빠는 몰라도 우리 아빠는 돌아온다고 되뇌며 나를 달랬죠. 휴전된 날, 동생들과 동네 밖으로 나가서 큰길을 내다봤어요. 해가 넘어가기 전 아빠가 오시리라 믿었죠. 어둠이 가득해도 아빠는 나타나지 않으셨고 어느결에 저희 등 뒤에 서 계셨던 엄마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왔어요.
▲ 김웅진 의원의 국회의원 기록 카아드 김웅진 의원이 자필로 쓴 자신의 이력서다.
ⓒ 국회사무처 제공
가끔 아빠의 등에서 나던 땀 냄새가 생각나요. 1945년 겨울 남쪽으로 넘어올 때, 엄마는 먼 길 떠난다고 나와 동생의 누비옷을 새로 해주셨고 사이사이 종이돈을 넣어 바늘로 꿰매셨어요. 동생은 그때 한 살이 안 되었죠. 동생은 엄마 등에, 나는 아빠 등에 업혀 큰 강물을 건넜어요. 뺨이 부르틀 정도로 추웠는데 아빠의 등에서는 뜨거운 김이 났어요. 큼큼하면서 솔잎 향이 곁들여진 냄새, 저는 이 내음을 한평생 기억하고 살았어요.
우리 집은 평범한 이산가족이 될 수 없었죠.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가 북에서 1958년, '재북 평화통일 촉진협의회'의 중앙위원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납북된 주요 인사가 다수 모인 단체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북 당국의 요구가 있었겠죠. 그런 까닭인가요. 우리 집에선 아버지 얘기를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생사를 알 수 없으니, 기일을 정할 수 없고 제사를 지낼 수도 없었죠. 막내가 남동생이기는 하나 엄마와 자매 셋을 합하면 여자가 많은 집인데도, 음습한 그림자가 어른거린 기억이 있어요. 연좌제 때문인지 육촌 형제까지 출국 금지가 되어 유학이나 사업에 애로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득한 옛이야기지만.
바람결에 들려온 아버지 소식이 있기는 해요. 미국에 사는 둘째 아들이 (외할아버지가 되는) 김웅진 의원에 대한 자긍심이 워낙 강해, 북녘땅을 출입하는 미국 기자에게 여러 차례 생사를 수소문했어요. 함경북도 무산까지 간 정황이 있다고 풍문만 전해 들었죠. 아빠가 재선 국회의원이니 북에서 사후에라도 예우하지 않았을까 기대하며 납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 묻힌 신미리 애국열사릉의 자료도 찾아봤어요. 안타깝게도 아버지의 흔적은 아직 발견할 수 없었답니다.
나는 늘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했어요. 그때마다 생사를 알 수 없다는 회신이 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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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관리되었을 당신의 생사가 확인 안 되는 게 이해할 수 없으나 받아들일 수밖에요.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유전자 확인에 쓰라고, 2025년 머리카락을 적십자에 넘겼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그리움만 간직하다 칠순이 되는 해 숨을 거두셨습니다. 엄마는 잊을 만하면 우리에게 "너희 아버지가 반민특위를 만든 분이다"라는 말씀을 아로새기듯 하셨어요. 초등학교 때는 그 의미를 몰랐어요. 숙명학교에 입학하고서 잔뜩 기대했죠. 새 학년이 되어 교과서를 받으면 밤새 아버지의 이름을 찾았어요. 6년 내내 헛수고였죠. 선생님 입에서도 아버지는 불리지 않았고. 제가 미술이 전공이나 대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오랜 세월 학교 다니면서 반민특위의 반자도 만나지 못한 셈이죠.
결혼하고서는 세 아들을 키우느라 아버지와 반민특위를 잊고 살았어요. 쉰에 접어든 1990년인가, MBC에서 8·15 특집으로 반민특위를 다룬 3부작 드라마를 방영했어요. 노태우 정부 시절이고 안기부의 서슬이 퍼럴 때였는데, 작품은 반향이 컸죠. 아버지를 다룬 이야기에, 푹 빠졌어요. 이게 계기가 돼, 조작된 '국회 프락치' 사건과 반민특위의 유족이 모이기 시작했어요. 가슴 아픈 사연을 이고 평생을 살아왔으니, 유족은 만나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죠. 특히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의 아드님 김정륙 선생이 기둥 노릇을 하셨어요.
▲ 2019년 3월 14일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오른쪽은 황교안 대표.
ⓒ 남소연
그런데 나경원 의원이 2019년 3월 14일 자유한국당 최고위원회의에서 "해방 후에 반민특위로 인해서 국민이 무척 분열했던 것 모두 기억하실 겁니다"라고 말합니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의 서훈 문제가 대두되자 이를 반대하면서 나온 발언이었죠.
유족은 화가 났어요. '반민특위 활동'을 '국론 분열'로 바라보는 태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죠. 우리는 분노를 머금고 "모여서 친목만 나눌 게 아니라 반민특위 정신을 되살리자, 민족정기를 세우자"라고 뜻을 모았어요. 곧바로 나경원 규탄 성명을 내고, 반민특위를 공격했던 중부경찰서를 항의 방문해 공식 사과를 요청했어요. 오죽하면 그때, 팔순을 바라보는 제가 마이크를 잡고 반민특위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고 외쳤을까요. 그날 연단에 서니 "너희 아버지가 반민특위 만든 분이다"라는 어머니의 유언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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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강하게 각세워 늘 신변에 위험이
그 무렵부터 저의 마음이 바빠졌어요. 눈이 침침하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면서도 반민특위를 공부하고 아버지의 자료를 모았어요. 둘째 아들과 함께 격려하며 아버지를 찾아 나섰죠. 친일 반민족 경찰 노덕술·최난수·홍택희·박경림이 반민특위 핵심 인사를 암살하려고 할 때, 아버지가 노일환·김장렬 의원과 함께 표적이 되었더군요. 반민특위 출범에 맞서 9월 23일 서울운동장에서 대대적인 반공대회가 열렸지요. 아버지는 "마치 일제가 36년간 한 것처럼 시민을 강제로 동원했다. 이승만 정부가 어떤 음모가 있는 것 같다"라고 성토하셨어요. 이승만과 강하게 각을 세웠으니 신변에 위험이 있었겠죠.
▲ 김웅진 의원 부부 전란을 겪고 집이 불타는 격변 속에서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사진.
ⓒ 김옥자여사 제공
또 국회 프락치 사건이 났을 때 이를 규탄하며 88명의 소장파 의원이 석방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지요. 그러자 극우단체와 관변단체는 소장파 의원을 규탄하는, 이른바 '국민계몽대회'를 1949년 5월 31일 탑골 공원에서 열었습니다. 아버지 김웅진은 대회를 조사하려고 김옥주·노일환 의원과 함께 현장에 갔다가 봉변을 당했어요. 아버지는 절망감을 느꼈으리라 생각돼요. 감히 아버지의 고독감을 백분의 일, 천분의 일이나 헤아릴 수 있을까요.
내 생에 마지막 바람은
자식이나 친지는 제 병세를 걱정하며, 신약이 나왔으니 표적 치료를 잘하면 된다고 격려해요. 병원 덕에 얼마나 연명할지 모르지만 남은 인생 두 가지 바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버지의 생사입니다. 돌아가셨겠지만 기일을 알았으면 해요. 북에서 가정을 꾸렸다면 홀로 맞지는 않으셨겠으나 임종은 어떠하셨는지, 남기신 말씀은 없었는지 궁금해요. 제게 큰 갈증으로 남아 있습니다.
또 하나는 아버지의 뜻, 친일반민족 행위 청산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는 바람입니다. 얼마 전 한 배우가 조상의 행위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랑하는 것을 보니, 우리 젊은이의 역사 인식에 큰 구멍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학교 교육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는 바람입니다.
요즘 잠자리가 뒤숭숭해요. 밤새 선잠만 자게 됩니다. 새벽녘이면 묘하게 아버지의 뒷모습이 나타나요. 솔잎 향에 뒤섞인 땀 내음, 겨울 강바람에도 김이 올라왔던 아버지의 등이며 어깨가 언뜻언뜻 보여요.
눈감기 전 아버지 묘소에 술 한잔 올리고 싶은 마음 간절하네요. 아버지 당신은 어느 산하에 묻혀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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