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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나 포토시 정상. 먼저 오른 등반가들이 내려오고 있다.
"이게 정말 가능한 걸까?"
볼리비아 라파스의 작은 숙소 벽에 붙어 있던 광고판을 보며 우리는 한참을 고민했다. 1박2일, 100달러, 해발 6,088m 봉우리 와이나 포토시Huayna Potos.를 가이드와 장비, 식사까지 모두 포함해 겨우 100달러로 등반시켜 준다는 문구였다.
"분명 사기일 거야! 싸도 너무 싸잖아?"
불과 일주일 전 우리는 남미 최고봉 아콩카과에서 내려왔다. 남미 안데스산맥의 최고봉이라는 타이틀 때문인지 아콩카과는 같은 6,000m대의 산임에도 입장하는 데만 수백만 원을 지불해야 했다. 게다가 식사도 불포함, 가이드도 없이 오르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이 산은 어떻게 30분의 1도 되지 않는 가격에, 가이드와 식사까지 포함이라는 걸까? 볼리비아의 물가가 저렴하다고 들었지만, 물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가격이었다.
아직 아콩카과에 다녀온 피로가 풀리지 않은 상태였지만 너무 궁금해서 가보고 싶었다. 손해 볼 거라곤 조금 더 쌓일 피로감 정도가 아닐까 싶었다. 산에서 내려온 뒤로는 배낭여행 모드로 전환해 캐리어 없이 작은 배낭 하나만 메고 여행 중이라서 아무런 등산 장비도 없었다. 하지만 광고판의 '무료 장비 대여'라는 말을 믿고 호텔 로비에서 투어를 신청했다. 그렇게 예정에 없던 또 하나의 6,000m대 도전이 시작됐다.
와이나 포토시 베이스캠프(4,800m).
세계에서 가장 쉬운 6,000m대 산
안데스산맥에는 6,000m가 넘는 산이 100개 정도 되는데, 그중 볼리비아에 6개가 있다. 그 6개의 산 중에서도 와이나 포토시(6,088m)는 가장 유명한 산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접근성이 너무 좋기 때문이다. 행정수도 라파스에서 차로 2시간 내로 베이스캠프에 도착할 수 있다. 다른 6,000m급 산처럼 며칠씩 걸어서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베이스캠프도 해발 4,800m에 위치해 있어서 정상까지 고도 상승이 약 1,300m에 불과하다. 그래서 대부분 빠르면 2일, 느리면 3일에 등반을 마칠 수 있어서 우리 같이 지나가던 여행자도 솔깃하지 않을 수 없다. 접근성이 좋다 보니 여행사의 가격 경쟁도 치열해서 굉장히 저렴한 상품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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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해발 6,000m가 넘는 산이다 보니 빙하지역을 지나기 때문에 피켈과 크램폰 등의 전문 장비는 필요하지만, 고난도 암벽 등반 기술을 요하는 구간은 거의 없어 첫 6,000m 도전지로 적합하다. 비교적 쉬운 산이라 해도 복병은 역시 고산병. 차량을 이용해 4,700m 지。에 내리면 고산병에 걸리기 십상이다. 다르게 말하면 고산병만 조심하면 도전해 볼 만한 산이라는 것이다. 혹시 정상 등정에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가격이 저렴하니 그렇게 아쉽지도 않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행정수도 라파스. 별빛이 내려온 것 같은 야경.
오래된 장비와 함께 시작된 즉흥 등반
와이나 포토시 투어를 신청한 다음날 아침. 호텔 로비에 볼리비아 현지인 가이드 존John이 도착했다. 호리호리한 체격만 봐도 산을 잘 오를 것 같은 느낌이 풍겨 왔다. 인사를 주고받자마자 서두르라는 존의 지시에 따라 근처 상가로 이동했다. 도착한 곳은 과거로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한 듯한 작은 장비 대여。이었다. 안에는 이중화, 크램폰, 헬멧 등의 등반 장비들이 가득했다. 솔직히 말하면 장비들은 최소 10년에서 20년은 되어보였다. 하지만 대부분 무료 대여란 말에 낡음은 클래식이 됐다. 피켈, 크램폰, 이중화, 방한복, 장갑까지 6,000m 등반에 필요한 장비를 모두 빌릴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피켈은 다소 무거웠지만 튼튼해 보였고, 운 좋게 발에 딱 맞는 이중화를 찾을 수 있었다. 아무리 짧은 등반이라도 신발이 잘 맞아야 안전하고 즐거운 등반을 할 수 있다. 등산 배낭은 추가 금액을 내고 빌려야 해서, 그냥 여행용으로 가져온 일반 배낭을 메기로 했다. 헤드랜턴도 무료였으나 보증금을 내야 했다.
장비를 챙긴 뒤, 우리는 버스터미널 같은 곳으로 이동했다.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공용 터미널은 아니고 표지판 하나 없는 12인승 봉고차들이 모여 있었다.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정거장처럼 보였다.
가이드는 이미 얘기가 된 듯한 차량을 잡았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올라탔다. 처음에는 우연히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 보니 모두 와이나 포토시 등반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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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색의 볼리비아 전통 복장을 입은 아주머니는 1박2일 동안 우리 등반의 식사를 담당할 주방 이모님이셨고, 다른 한 명은 우리와 일정이 같은 옆 팀 가이드였다.
하이캠프 내부의 식당.
짐칸이 따로 없는 봉고차 맨 앞 열에 배낭을 쌓아두고 뒷자리에 앉았다. 봉고차는 라파스 시내를 빠져나가기 위해 건물 사이로 난 언덕길을 달렸다. 안데스산맥 한가운데 위치한 라파스La Paz는 해발고도 3,650m의 고산 도시인데, 거대한 협곡 안에 도시가 자리잡은 매우 독특한 지형이었다. 그래서 밤에 도심에서 하늘을 바라보면 도시 전체가 은하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라파스 시내를 빠져나오니 저 멀리 구름 위로 하얀 봉우리가 보였다.
"저게 와이나 포토시야."
가장 오르기 쉬운 6,000m 산이라고 했는데, 멀리서 보니 정상 부근이 빙하로 가득했다. 다행히 우리는 다른 루트로 오른다고 한다. "휴"하고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졌다.
중간에 작은 슈퍼마켓에 들렀다. 가이드는 내일 산행에 필요한 간식을 사라고 했다. 우리는 아콩카과 등반 때 남은 간식이 있었기에 따로 준비할 것은 없었다.
식량 운송은 '핑크색 보자기'로
그렇게 약 1시간 반을 달려 오전 11시 반, 와이나 포토시의 베이스캠프(4,800m)에 도착했다. 베이스캠프 산장 앞마당에는 여러 등반 팀들의 등반 장비가 펼쳐져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2박3일 일정으로 산을 오르는데 첫날은 고소적응과 빙하 훈련을 하고, 다음날 본격적인 정상 등정을 하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이미 아콩카과에서 충분히 고소적응을 마친 상태여서 1박 2일 일정으로 바로 진행했다.
하이캠프로 가는 길, 우리의 식사 담당인 셰프 이모님이 앞장 서 걸어가고 있다.
산장에 도착하니 바로 간단한 도시락을 준비해 준다. .심까지 든든하게 먹고 나니 오후 12시. 바로 마지막 캠프인 하이캠프로 출발한다고 한다. 와이나 포토시 등반은 모든 게 속전속결이다. '빨리빨리' 문화인 한국인 성격에는 딱 맞을 수도 있지만, 고산이라 자칫하면 고산병이 올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겠다.
하이캠프로 가는 길은 빙하 옆 빙퇴석 지대를 따라 이어졌다. 왼편으로 정상 부근에서 내려오는 큰 빙하가 보이고 빙하 큰 자락에 빙하 훈련을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날씨는 계속 변했다. 맑아졌다가 흐려지고, 다시 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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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까 베이스캠프까지 버스를 같이 타고 온 아주머니가 앞에 걷고 있었다. 분홍빛 볼리비아 전통 치마를 입고 가벼운 운동화 차림으로 거친 돌길을 오르는 모습이 대단해 보였다. 이 길을 최소 수십 번은 올랐을 테니 그렇게 발걸음이 가벼웠을 터다. 그녀가 어깨에 메고 있던 핑크색 보자기 안에는 1박2일 동안 먹을 우리의 식량이 들어 있었다.
정상 아래 가파른 절벽으로 접근하고 있는 등반가들.
2시간 정도 지그재그로 난 돌길을 올라가 해발 5,130m의 하이캠프에 도착했다. 하이캠프에는 여러 개의 산장이 있었고, 우리가 들어간 곳은 수십 개의 2층 침대가 놓인 커다란 공간이었다. 60명은 잘 수 있는 침실 공간과 긴 테이블이 두 개 나란히 놓여 있는 다이닝 공간, 그리고 물을 끓이고 음식을 준비하는 부엌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우리는 일찍 도착한 덕분에 1층 침대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제 여기서 1,000m 조금 덜 되게 오르면 정상이라니 놀랍기 그지없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와이나 포토시 등반 광고판을 본 지 아직 24시간이 채 안 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추진력과 투어의 편리함에 감탄이 나왔다.
이른 오후에 하이캠프에 도착했지만 시간이 그리 여유롭지는 않았다. 자정에 일어나서 오전 1시 출발이기 때문에 이른 저녁을 먹고 최대한 빨리 눈을 붙여야 최상의 컨디션으로 정상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건 물을 계속 마시는 것! 감사하게도 키친에서 따뜻한 물을 제공해 줘서 따뜻한 차와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저녁 식사 전에 쿠키와 팝콘 같은 간식도 제공해 주니 호텔이 부럽지 않았다.
멀리 불타는 것 같은 빛은 도심의 야경이다.
오후 5시에 준비된 저녁 메뉴는 스테이크와 파스타! 해발 5,000m 산장에서 고기까지 먹다니 호사가 따로 없다. 저녁까지 든든하게 먹고 오후 6시에 침대에 누웠다. 바로 잠들면 6시간을 잘 수 있지만 잠들기가 쉽지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잠들지 못하고 밤새 뒤척이는 게 느껴졌다. 급작스럽게 올라온 고산이라서 쉽게 잠들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6,088m 정상으로 출발!
가볍게 눈만 붙이고 일어나니 출발 시간 12시. 모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말없이 장비를 챙겼다. 화장실에 가려고 산장 문을 여니 강한 눈발이 얼굴을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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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심 별이 가득한 하늘을 기대했는데 조금은 아쉬웠다.
이미 발목보다 깊게 눈이 쌓여 있어 산장을 나서자마자 크램폰을 착용했다. 하이캠프 위부터는 빙하가 시작된다. 낮에는 크레바스가 곳곳에 드러나지만, 지금은 헤드랜턴 불빛만 비출 뿐 주변은 새까만 어둠이었다. 어디가 빙하인지, 어디가 절벽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이상하게 불안하지는 않았다. 와이나 포토시를 100번 넘게 올랐다는 가이드 존이 앞에서 길잡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로프로 서로를 연결한 안자일렌 상태로 한 걸음씩 그의 뒤를 따랐다.
눈은 계속 깊어졌다. 선두에서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며 길을 만드는 가이드의 움직임이 .。 무거워 보였다. 재민이가 대신 러셀을 하겠다고 했지만, 존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내 일이야."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다시 묵묵히 눈을 헤쳐 나갔다. 가끔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멀리 도심의 불빛이 짙은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내려다 보였다. 해발 4,000m의 도시가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안데스산맥 아래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이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풍경이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경사는 더욱 가팔라졌다. 정상 직전에는 40도 안팎의 눈 사면이 이어졌다. 발을 잘못 디디면 그대로 미끄러질 것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 발을 내딛고, 피켈을 찍고, 다시 한 발. 그렇게 반복되는 단순한 동작이 어느새 전부가 되었다.
어둠 속을 걷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동쪽 하늘이 조금씩 밝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일출은 없었다. 두꺼운 구름이 하늘을 완전히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와이나 포토시 정상. 가이드 존과 함께 올랐다.
기대했던 정상에는 안개뿐
주변이 조금씩 밝아지자 드디어 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보다 가까웠다. 30분 정도면 충분히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가이드가 걸음을 멈추더니 말했다.
"돌아가자."
순간 귀를 의심했다.
'정말? 얼마 안 남았는데?'
가이드의 판단은 악천후 때문이었다. 밤새 내린 눈으로 러셀은 。。 힘들어졌고, 시야도 끝내 열리지 않았다. 이런 날씨라면 대부분 정상을 포기한다고 했다. 안전보다는 어차피 정상에 서도 조망이 없다는 。이 더 큰 이유로 보인다.
우리가 판단하기에 그렇게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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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체력적 여유도 남아 있었고, 시간도 충분했다. 무엇보다 우리가 제일 앞에 가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천천히 가도 전혀 문제없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정상이 정말 코앞에 있었다.
"우리가 러셀 할게요. 가시죠!"
재민이가 앞장서겠다고 하자 가이드는 잠시 우리를 바라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발걸음이 이어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리고 약 30분 뒤, 큰 문제없이 해발 6,088m 와이나 포토시 정상에 섰다.
하지만 정상이라는 실감은 쉽게 들지 않았다. 사방은 온통 하얀 안개뿐. 기대했던 안데스의 파노라마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때 가이드가 배낭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Huayna Potos.'
산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우리는 기념사진을 남겼다. 그 사진이 아니었다면 이곳이 정상이라는 사실조차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날 정상에 오른 사람은 10명 남짓. 하이캠프에서는 약 100명 가까운 등반가가 출발했지만, 악천후 때문에 대부분 중간에서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하산길. 바로 옆에 히든 크레바스가 있다. 잘 안 보여서 더 잘 오른 것 같다.
하산을 시작하자 조금씩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밤에는 존재조차 몰랐던 거대한 얼음 균열들이 바로 우리 옆에 입을 벌리고 있었다. 어떤 곳은 사람 몇 명이 들어갈 만큼 깊어 보였고, 어떤 곳은 얇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우리가 이런 곳을 지나왔다고?'
밤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에 오히려 덜 무서웠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이캠프로 돌아온 시간은 오전 9시였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여덟 시간 가까이 걷고 돌아왔지만, 아직 하루는 한참 남아 있었다. 아침식사인지 。심식사인지 모를 오전 10시의 식사를 마친 뒤 다시 베이스캠프로 내려왔고, 봉고차를 타고 라파스로 돌아온 시간은 오후 3시. 짧지만 강렬했던 1박2일이었다.
정신없는 시간이 지나고 난 뒤 。차 기억 속에 와이나 포토시가 정리돼 자리 잡기 시작했다. 먼저 '가장 많은 수식어를 가진 산'이다. 세계에서 가장 저렴하고, 가장 오르기 쉬운 6,000m급 봉우리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가장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산이다. 정상도, 일출도, 전망도 보지 못했지만 이상하게 아쉬움보다 웃음이 먼저 난다. 언젠가 다시 찾게 된다면 그때는 안데스의 풍경을 마음껏 눈에 담아오고 싶다.
하산길에 마주한 설벽.
월간산 9월호 기사입니다.
빛은 도심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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