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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구=아시아경제 김종화 기자] 지난 2일 강원 양구군 해안면 국립DMZ자생식물원. 가을빛이 내려앉은 정원에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축배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소프라노와 바리톤의 목소리에 피아노와 더블베이스 선율이 더해졌다. 개원 10주년을 축하하는 평화음악회였다.
산으로 둘러싸인 정원에는 국내외 생물다양성 전문가들이 모였다. 겉으로는 여느 가을 정원과 다르지 않은 평화로운 풍경이다. 하지만 산 너머로 조금만 올라가면 민간인의 접근이 제한되는 철책과 비무장지대(DMZ)가 이어진다. 이곳에서 지난 10년간 해온 일도 그 경계의 식물을 찾아 기록하고, 사라질지 모를 식물을 지키는 일이었다.
지난 2일 강원 양구군 국립DMZ자생식물원을 찾은 국내외 생물다양성 전문가들과 한국과학기자협회 회원들이 식물원의 주요 전시원을 둘러보며 DMZ·접경지역 식물 보전 현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국립DMZ자생식물원 제공
신현탁 국립DMZ자생식물원장은 DMZ가 사람의 접근이 제한돼 자연이 온전히 보존된 공간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다고 했다. 신 원장은 "DMZ가 잘 보존돼 있다고 생각하지만 철책 주변은 사실 많이 훼손돼 있다"며 "군부대가 들어가 있고 차량이 다니면서 외래식물도 들어온다"고 말했다. 실제 DMZ에서 생태계교란 식물인 가시박을 발견한 뒤 다시 현장을 찾았을 때 주변으로 빠르게 퍼진 것을 확인해 군부대에 제거를 요청하기도 했다.
철책 따라 150곳…식물 1840종의 '주소'를 찾다
DMZ자생식물원이 지난 10년간 공을 들인 것은 DMZ와 접경지역에 어떤 식물이 어디에서 살아가는지를 직접 확인하고 기록하는 일이었다. 국내 최초로 DMZ와 접경지역 철책 조사에 나서 미조사 산지 150개소를 조사했다. 식물표본 8284。을 확보했고, 1840종의 DMZ·접경지역 분포식물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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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전이 필요한 중.관리 후보종도 30종을 선정했다.
신 원장도 군의 허가를 받아 약 3년간 철책을 따라다니며 식물을 조사했다. 동부와 중부, 서부 접경지역에서 씨앗을 직접 채집하고 증식해 식물원에 옮겨 심었다. 철책 주변 훼손지를 그 지역에서 자라는 자생식물로 복원하는 실험도 이어졌다.
10년에 걸친 조사의 의미는 단순히 식물의 숫자를 확인하는 데 있지 않다. 신 원장은 "예전에는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지만 지금은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안다"며 "그 식물을 현지에서 보전해야 할지, 식물원으로 가져와 현지외보전을 해야 할지 판단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조사 결과는 강화·김포·파주·연천·철원·화천·양구·인제·고성 등 접경지역 식물상 자료와 자생식물 분포도로 이어졌다. 철책 안 훼손지를 복원하기 위해 자생식물 54종을 선정하고 8개소, 총 2480㎡에 야생화벨트 시범사업지도 만들었다. 복원에 사용할 자생식물 종자는 연간 약 11㎏을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철책 조사는 연구자의 의지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남북 관계와 군 경계 상황에 따라 출입 여부가 달라진다. 과거 조사했던 곳도 지금은 들어갈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신 원장은 "조사하고 싶어도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곳들이 있다"며 사람의 접근이 거의 없었던 습지 등에는 아직 확인하지 못한 식물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총성이 오갔던 펀치볼…황무지가 식물원이 되기까지
식물원이 들어선 해안분지는 '펀치볼(Punch Bowl)'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의 모습이 화채 그릇을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지금은 고랭지 농경지와 산림이 어우러진 평온한 곳이지만 70여년 전 한국전쟁 당시에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격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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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병력이 맞섰던 산과 계곡 아래에 지금은 식물을 수집하고 보전하며 훼손된 자연을 되살리는 국가 연구시설이 자리 잡았다.
DMZ자생식물원도 처음부터 지금처럼 나무가 우거진 곳은 아니었다. 조성 전 이곳은 계단식 밭으로 이용되다 방치된 묵밭과 황무지였다. 2016년 개원 당시만 해도 키 작은 나무와 식물이 대부분이었다. 10년이 흐르면서 나무가 자랐고 이제 곳곳에 짙은 그늘을 만든다.
현재 식물원은 18㏊ 규모다. 보유 식물은 1172종으로 특산식물 90종, 북한식물 31종, 한반도 북방계식물 274종 등이 포함돼 있다. DMZ 자생식물원 현황 및 주요성과 10선 지난 5월에는 북한식물전시원도 문을 열었다. 현재 북한식물 생체와 종자 54종을 확보했고 이 가운데 25종의 증식·재배·관리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지난 5월 문을 연 강원 양구군 국립DMZ자생식물원 내 북한식물전시원. 북한과 북방계 식물의 수집·증식·보전을 통해 한반도 식물다양성 보전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조성됐다. 국립DMZ자생식물원 제공
직접 북한에 들어가 식물을 조사하기 어려운 만큼 북한에 어떤 식물이 사는지를 확인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국립수목원은 서울대·목포대와 함께 북한 관속식물 목록을 정리해 2223종의 북한식물 체크리스트를 구축했다. 해외에 남아 있는 북한·북방계 식물을 다시 확보하는 시도도 하고 있다.
신 원장은 남북 관계가 풀려 공동조사가 가능해진다면 같은 종의 식물이 오랜 분단을 거치며 남과 북에서 어떻게 달라졌는지 비교하는 연구도 가능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북한의 식물원과 교류할 수 있다면 굉장히 좋은 시너지가 있을 것"이라며 "DMZ라는 이름을 가진 기관인 만큼 식물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함께할 수 있는 연구와 과제를 만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DMZ의 다음 10년…'경계'를 '연결'의 공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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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원 10주년을 맞은 DMZ자생식물원이 내놓은 화두도 '생물다양성과 평화, DMZ 너머의 미래'였다. 산림청 국립수목원과 생물다양성협약(CBD) 사무국은 지난 1~2일 포천 국립수목원과 양구 DMZ자생식물원에서 국제심포지엄을 열었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유엔환경계획(UNEP) 등 국내외 전문가들이 DMZ를 초국경 생태보전과 국제협력의 공간으로 활용할 가능성을 논의했다.
DMZ자생식물원은 국제협력의 기반도 넓히고 있다. 동아시아 식물보전 네트워크에는 6개국 7개 기관이 참여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182만건의 종 발생정보를 구축했다. 지난 2일에는 북한식물 종자 20종과 평화를 염원하는 메시지를 담은 타임캡슐도 봉인했다.
현장을 둘러본 해외 전문가들의 시선도 단순한 식물 보전에 머물지 않았다. 독일 하이브리드 스페이스 랩(Hybrid Space Lab)의 엘리자베스 시키아리디 교수는 DMZ에서 직접 수집한 식물이 이곳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강력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자연에 예술과 문화를 결합해 이곳을 평화와 화해를 위한 공간으로 발전시킬 가능성도 제시했다.
앤서니 앨리슨(오른쪽) 미국 '자연을 위한 파트너십(Partnerships for Nature)' 이사회 의장이 지난 2일 강원 양구군 국립DMZ자생식물원에서 DMZ의 생물다양성 보전과 국제협력에 대해 질문한 기자들의 의견에 답변하고 있다. 국립DMZ자생식물원 제공
앤서니 앨리슨 미국 '자연을 위한 파트너십(Partnerships for Nature)' 이사회 의장은 DMZ자생식물원을 생물다양성과 교육, 보전뿐 아니라 평화의 가치까지 함께 담은 상징적인 공간으로 평가했다. 전쟁의 기억을 간직한 펀치볼에서 식물을 매개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앨리슨 의장은 "이곳은 생물다양성과 교육, 보전, 평화의 가치가 한데 모인 상징적인 장소"라며 "앞으로 국경을 넘어 자연을 연구하고 배우며 협력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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